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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국정농단의 연대기



JTBC<이규연의스포트라이트>가 15일 <최태민 죽음·재산 미스터리>라는 부제로 추적한 최태민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뿌리가 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태민은 국정농단 주범 최순실의 친아버지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었다.


23년 전 '병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의 죽음과 최씨 일가가 축적한 천문학적인 재산의 실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94년 5월 숨을 거둔 최태민의 사망진단서에 적힌 사망원인은 '병사'였다.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63)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최태민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의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최태민 죽음의 미스터리 중심에는 최씨 일가가 축적한 막대한 재산이 있다. 


최태민 일가가 이런 재산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최씨의 다섯번째 부인이자 최순실의 친모인 임선이(2003년 사망)씨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최태민씨 일가의 재산 규모와 형성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상태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에도 최태민의 재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최태민은 자신의 재산을 축적한 모든 경위가 박근혜의 지시에 의하여서였다고 주장해 수사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세무조사를 받은 임선이씨는 "감자 팔아 빌딩을 샀다"고 주장했다.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씨는 "1994년 아버지가 1000억대 부동산과 골드바 등 전재산을 박근혜 씨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했으며, 이를 눈치 챈 누군가에 의해 4월 중순쯤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며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최태민은 일제시대엔 순사로 근무했고, 해방후에도 경찰관 생활을 잠시 하다가 이내 종교계로 진출해 승려 행세를 하다 영세교라는 기독교 계통 신흥종교를 창시했다. 


이후엔 자신을 목사를 칭하면서 박근혜 당시 영애와 함께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을 조직해 사회활동에 몰두했다.




최태민은 구한말 황해도 사리원시에서 출생했다. 최태민의 주민등록상 출생일은 1912년 5월 5일이지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묘지의 비석에는 1918년 음력 11월 5일로 기록돼 있다.


최태민은 일제시대인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황해도경 소속 순사로 재직했으며 해방 이후 에도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임명돼 5년여간 경찰과 군에서 근무했다.


1951년 3월 군에서 나온 뒤에는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고, 1955년에는 경남 양산군의 비인가학교인 개운중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최태민은 이후로도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한국복지사회 건설회 회장등 다양한 직책을 거쳤다. 


최태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접근한 시도한 처음 시점은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최태민은 1963년 5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이 되는데, 이는 당시 민주공화당 총재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가 없이는 될 수 없는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최태민의 주업은 종교였다. 최태민은 처음에는 주로 불교계 주변을 떠돌며 승려 행세를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대전시 대사동에서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한 영세교라는 종교를 창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최태민은 이름을 수차례 바꿔 최도원(崔道源), 최상훈(崔尙勳), 최퇴운(崔退雲), 공해남(孔亥南) 등으로 개명을 거듭했으며,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1977년 3월 9일부터 사용했다.


영세교 창시 당시 최태민은 자신을 ‘영의 세계에서 온 칙사’라는 뜻인 ‘원세경’이라고 칭했다. 


최태민은 1975년 무렵부터는 목사 직함을 사용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의 조현종 목사가 최태민으로부터 헌금을 받고 목사 안수를 해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최태민은 이 때가지만 해도 빈궁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1975년 3월 6일 박근혜 당시 영애와 접촉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최태민은 같은해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회를 조직해 자신이 총재를 맡았다. 


대한구국선교회는 이후 구국봉사단을 거쳐 1979년 5월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을 이어가는데, 박근혜 당시 영애는 새마음봉사단의 총재 타이틀을 달고 명예총재인 최태민과 함께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최태민과 '일반인' 박근혜와의 관계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에도 지속됐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는데, 이 때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했다.


이후  1989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해 월간신문인 근화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87년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과 동생인 박근령-박지만과의 사이에 육영재단 운영권을 싸고 다툼이 시작됐는데, 이 때 박근령측은 다툼의 원인이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해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박근령과 박지만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이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 달라"며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퇴임하는 시점에도 박근혜는 최태민을 적극 옹호했다.


박근혜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최태민이 사망한 이후인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 검증 청문회 당시 "중앙정보부 조사에 의하면 최태민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 등으로 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되는 등 비리 건수가 40여 건 된다고 한다. 알고 있었느냐"고 한 검증위원이 박근혜 후보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때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가 나와 중정 부장, 최태민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를 하실 때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다.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하여 보고 문제가 있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셨다. 아버지는 친척을 감옥에 보낼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다. 그 쪽에 가서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태민에 대한 신뢰감을 감추지 않았다.


최태민에게는 6명의 배우자가 있었다고 한다.  최근 최태민의 독살설을 제기한 아들 최재석씨는 최태민의 네번째 부인 소생이다. 


최태민의 다섯번째 부인인 임선이씨는 2003년 사망했다. 임선이와 최태민 사이에서는 최순득, 최순실, 최순천 3자매가 출생했다.


최순득의 딸 장시호와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최태민의 손녀가 되는 셈이다.


결국 최태민 일가는 3대에 걸쳐 박근혜 라는 특수 인물과 인연을 이어오며 국정농단을 일상화했고, 결국 자신들 집안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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