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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은 누구?


안희정 충청남도 지사가 22일 대권 출사표를 던졌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대선 잠재 후보 중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은 안희정 지사가 처음이다.


안희정 지사는 이날 서울 종로구 혜화동 굿시어터에서 '안희정의 전무후무 즉문즉답' 행사를 열고 "대통령이라고 쓰고, 임금님이라고 읽는 시대를 끝내자"며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안 지사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40대 기수론과 유사한 젊은 지도자상 각인을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안 지사는 이날 자신이 ‘김대중·노무현의 역사를 잇는 후보’임을 강조했다. 안희정 지사는 “40대 기수론으로 대한민국 야당의 역사를 새로 썼던 김대중의 역사, 2017년 안희정이 그 역사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출마선언은 소극장에 온 시민들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질문에 안 지사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4000여명이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으로 생중계된 안희정 지사의 출마선언 방송을 시청했다. 


안 지사는 시민들과 함께 점심 식사로 빈털털이 젊은이들의 상징이기도 한 ‘컵밥’을 먹었다. 


안희정 지사는 '시대교체'를 이번 대선의 케치프레이즈로 삼았다. 


안희정 지사는 "1987년 6월 항쟁 이래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30년을 시작해야 한다. 시대교체의 시작은 다가올 대통령선거"라며 "새로운 30년, 누구와 시작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어 "30년 후를 내다볼 리더십이 중요하다. 세상을 역동적으로 바꿔나갈 지도자가 필요하다. 입으로만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고 몸과 마음, 그리고 행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대교체의 시작"이라며 자신이 시대교체의 적임자라고 역설했다. 


안 지사는 "저는 대한민국의 아들이다"며 "그 동안 일관되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지금은 사드 반대투쟁을 하고 계신 경북 성주의 할머니부터, 저기 광주에서 지난 총선 때 국민의 당에 투표하신 자영업자,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부산의 어느 아주머니,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수도권의 직장인, 최근 처음으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어느 청춘남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강조했다. 


안희정 지사는 그러면서 "새로운 개척자 정신이 필요하다. 새로운 대통령도 필요하다. 구태와 낡은 관행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며 "더 이상 옛날에 머무르지 말고 박정희 시대와 작별하자. 20세기의 잘못된 유산과 헤어지자"고  박근혜 대통령측에 각을 세웠다. 


경제정책은 따로 내놓지 않았다. 전임 대통령들이 내놓았던 정책들만 잘 해도 된다는 이유에서다


안희정 지사는 "경제에 관하여 저는 특별히 새로운 청사진을 내놓지 않는다. 지난 6명의 대통령이 펼친 정책을 이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토지공개념,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전략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IMF 극복과 IT산업 육성,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혁신경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녹색성장,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정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협치'를 주요 정치공약으로 제시했다. 


안희정 지사는 "대한민국은 새로워져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민주주의가 복원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희정 지사는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한 다수당에 국무총리 지명권을 주겠다"며 "총리는 내각을 통할하며 내치에 전념하고, 대통령은 대외적으로는 5천만 국민을 대표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장기적 국정과제에 몰두할 것"이라는 구상을 밝혔다. 


지난 보수정권 9년동안 가장 후퇴한 분야로는 외교안보를 꼽았다.


안희정 지사는 "외교안보문제에 초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국가외교안보전략회의'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남북대화 재개를 약속한 안희정 지사는 "북한이 신뢰할 변화의 징후를 보이고, 국제사회의 제재가 완화된다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가장 먼저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방분권의 강화도 공약했다.


안희정 지사는 또 "중앙집권시대, 한양중심의 시대, 엘리트 중심의 시대를 청산해야 한다. '지침이 내려올 때 까지 가만히 있어라'는 중앙집권시대의 지침은 세월호 선장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며 지방분권시대를 약속했다. 


안 지사는 자신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잇는 민주당의 '적자'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십대 후반에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저는 김대중, 노무현의 길을 따라왔다"며 "수많은 선배들이 당을 손가락질하며 떠날 때도 저는 고립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당을 지켰다. 저는 정치를 계속하는 한 이 길을 갈 것"이라고 자신이 민주당의 '적자'임을 피력했다. 


안 지사는 "저는 민주당의 적자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한다. 반드시 제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라며 "제가 민주당의 승리를 가져오겠다. 정권교체의 주역이 되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안희정 지사는 1965년 충남 논산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남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민주화 잡지 '평천하'를 읽었다는 이유로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제적됐다. 이후 서울에 있는 성남고에 진학했으나 자퇴하고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벌인  '국풍81'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안희정 지사는 1983년 검정고시를 보고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간 이유가 "제대로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안 지사의 설명이다.


안희정 지사는 고려대 입학 후 학내 운동권 서클 14개 통합해 '애국학생회'를 조직한다. 안희정 지사는 1988년 반미 청년회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 체포돼 10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안희정 지사는 1989년 1월 통일민주당의 김덕룡 의원의 비서로 기성 정치권에 입문했다.


1990년 1월 3당합당이 일어나는데 이때 노무현,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박찬종, 홍사덕, 이철 등 7인이 3당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새 민주당을 결성했다. 


안희정 지사도 이 때 민주당 잔류를 택했다.


하지만 안희정 지사는 1992년 4월 이철 의원이 당선된 직후 비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떠났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소신없는 정치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는게 안희정 지사의 당시 정계 은퇴의 이유였다.


정계를 떠난 안희정 지사는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일했다.  제적되었던 고려대 철학과에 복학해 졸업장도 받았다. 


하지만 1994년 6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아 이광재 전 의원과 함께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돕는 일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다시 정치로 돌아왔다.


2002년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행정팀장과 정무팀장 등을 맡아 참여정부 출범에 일조했다. 


참여정부 시절 안희정 지사는 이광재 전 의원과 함께 '좌 희정-우 광재'로 불리며 정권 실세로 칭해졌다. 


하지만 이런 탓인 지 안희정 지사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각종 부패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는 등 정치적 고난기를 보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한테서 백화점 상품권 5000만 원어치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안희정 지사는 2003년 12월 삼성 등 기업들로부터 대선 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고, 2004년 9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했다. 


안희정 지사는 그 후 노 대통령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참여 정부 임기 동안 공직을 사양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 후반인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을 출범시키고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고, 2008년 7월엔 통합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지사에 출마해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2.4%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안희정 지사는 충남 지사 당선 이후 유능한 지방정부의 모델을 만든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2014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공약이행평가에서 4년 연속 최우수등급을 받아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안희정 지사는 2014년 6월  제6회 지방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8%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야권 '잠룡'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